이응노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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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암연보

이응노

고암 이응노 ( 顧菴 李應魯 1904 - 1989 )

1904년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난 고암 이응노 화백은 동아시아의 서화전통을 활용해 현대적 추상화를 창작한 한국현대미술사의 거장이다.

전통 사군자 작가로 미술에 입문하였고 1930년대 후반과 1940년대 전반에는 일본에 유학하여 새로운 산수화풍을 습득하기도 했다.

1958년 프랑스로 건너간 이후 동서양 예술을 넘나들며 ‘문자추상’, ‘군상’ 시리즈 등 독창적인 화풍을 선보이며 유럽 화단의 주목을 받았고 독일, 영국, 이탈리아, 덴마크, 벨기에, 미국 등지에서 수많은 전시회를 열었다. 1964년에는 파리에 위치한 세르누시 미술관 내에 ‘파리동양미술학교’를 설립해 프랑스인들에게 서예와 동양화를 가르치며 동양문화 전파에 힘쓴 교육자이기도 했다.

  • 어린 시절~수련기
    (1904년~1920년대)
  • 일본 유학시절
    (1930년대~1944년)
  • 해방 ~ 한국전쟁 이전
    (1945년~1949년)
  • 한국전쟁 ~ 도불 이전
    (1950년~1958년)
  • 도불 이후 ~ 동백림 사건
    (1959년~1969년)
  • 동백림 사건 이후
    ~1970년대
  • 1980년대
    ~현재

1904년

1세

이응노(李應魯)는 1904년 음력 1월 10일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홍천마을에서
태어났다. 이 해는 갑진년(甲辰年) 용의 해였다. 후에 이응노는 태몽에 용이 나타났다는
의미의 ‘용몽자(龍夢子)’를 또 다른 호로 쓰는가 하면 ‘용’을 자신을 가리키는 글자로도
사용했다. 이응노의 집안은 대대로 마을에서 서당을 운영하는 문인 집안이었고 아버지
이근상(李根商) 역시 서당 훈장을 하며 집안을 이끌어갔다.

1910년

7세

한일합병으로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의병활동을 하던 작은 아버지 이근주(李根周)가 자결을 하였고 무덤 앞에서 통곡하던 집안 어른들의 모습이 어린 이응노에게 생생하게 각인되었다.
아버지에게 한문과 붓글씨를 배우던 중 홍성 읍내의 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신식 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1912년

9세

계속되는 집안의 반대로 보통학교를 다닌 지 2년 만에 그만두었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양반으로서의 지조를 강조하는 아버지 사이에서 갈등하던 중 어느 날 자신의 긴 머리를 잘라버리는, 단발을 감행하기도 했다. 또 그림 그리는 것을 반대하는 아버지 때문에 몰래 혼자서 땅바닥이나 흙벽처럼 눈에 띄는 모든 곳에 그림을 그려나갔다.

1919년

16세

당시 관습에 따라 조혼을 하다. 부인은 경기도 이천 태생으로 홍성의 생가 근처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1920
-1921년

17-18세

동네 행사 때 사용할 병풍그림이나 상여용 그림, 집안 장식용 그림 등의 주문을 받아 곧잘 그리며 집안 생계를 도왔다. 이 무렵 그림 배우는 것을 허락한 아버지의 소개로 충남 당진의 염재 송태회(念齋 宋泰會)에게 수묵화와 사군자의 기초를 배웠다.

1922년

19세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우기 위해 서울로 갔다. 생계를 위해 서울 광화문의 종로 장의사에서 상여에 단청 그리는 일을 하던 중 영친왕(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의 스승으로 유명한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의 문하에 입문하였다. 해강 김규진은 글씨와 그림에 뛰어날 뿐만 아니라 서울에 ‘천연당(天然堂)’이라는 사진관과 최초의 상업화랑인 ‘고금서화관(古今書畵館)’을 세우는 등 당대 서화계에서 선구적인 인물이었다.

1923
-1924년

20-21세

이른 봄 스승 김규진으로부터 ‘죽사(竹史)’라는 호를 받았다. ‘대나무처럼 항상 푸르러라’는 의미였다. 김규진은 이응노가 그림 재주가 뛰어나다며 아꼈고 이응노는 다음 해인 1924년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청죽(靑竹)〉이란 작품으로 처음 입선을 하며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김규진에게 사군자를 배우는 한편 서양화·동양화·조각·데생을 함께 가르치는 고려미술원에서도 학습하였다.

1925년

22세

스승으로부터 독립하여 표구점과 종로 4가 동일당 간판점에서 1년 남짓 일하였다. 상점과 극장의 간판을 그리는 일을 하였는데 배우 사진을 보면서 서양화식으로 음영을 넣기도 하였다.

1926년

23세

전주로 내려가 ‘개척사’라는 간판점을 차렸다. ‘개척사’는 날로 번창하였고 이응노는 간판점을 운영하면서도 꾸준히 사군자 그림을 그려 스승 김규진에게 지도를 받았다. 또 서울과 전주를 오가며 서울과 호남 지역의 서화가들은 물론이고 대전·공주 등 충남 일대의 서화가들과도 늘 교류하였다.

1931년

28세

어느 봄날 몰아치는 비바람에 술렁거리며 이리저리 쓰러지는 대밭의 모습을
보고 강한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지금까지 스승의 그림을 본으로 삼아 그리던
천편일률적인 모습과는 전혀 다른, 드라마틱한 움직임을 보며 살아있는 대나무
그림을 그려야한다고 느꼈다. 이때의 인상을 되살려 그린 대나무 그림 두 점을 5월의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했고 그 중에서 〈청죽〉이 특선을 차지하였다.
이 그림은 이왕가(李王家, 조선왕실의 식민지 시대 공식명칭)에서 매입하였다.

1933년

30세

11월, 전주 공회당(식민지 시기의 공공회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 무렵 점차 일본 화단으로의 진출을 꿈꾸기 시작했다. 중국이나 일본의 친지들에게 부탁해 우창숴(吳昌碩), 치바이스(齊白石),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과 같은 중국·일본 화가들의 화집을 구해 연구하였다.

1935년

32세

제98회 《일본미술협회 전람회》에 〈풍죽〉을 출품하여 입선하는 등 일본에서의 활동기반을 구체적으로 준비해나갔다.
전주 출신 박귀희와 결혼하였다. 조혼한 첫 아내는 이 무렵 사망하였다. 박귀희는 이응노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고 조카들을 포함해 대가족이었던 집안을 꾸려나가며 이응노가 창작에 몰두할 수 있도록 도왔다.

1936년

33세

가을에 일본 유학을 떠났다. 사설미술교육기관인 가와바타화학교(川端畵學校) 일본화과, 혼고회화연구소(本鄕繪畵硏究所) 양화과에 등록하고 동양화와 서양화의 장점을 두루 공부하였다. 뒤이어 일본화의 대가 마츠바야시 게이게츠(松林桂月)의 덴코화숙(天香畵塾)에 입문하여 그림을 배웠다.
또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쿄 외곽 지역인 오지구의 후쿠로마치에 요미우리 신문배달소를 운영하였다. 그리고 충남 고향의 조카들을 불러다가 신문 배달을 시키며 학교에 보내 교육받도록 하였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은 젊은이들이 교육을 받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938년

35세

제17회 《조선미술전람회》에 〈동도하안(東都河岸)〉과 〈동원춘사(東園春事)〉를 출품하여 입선하였다.

1939년

36세

‘고암(顧菴)’이라는 새로운 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 호는 1933년 한학자 규원 정병조(葵園 鄭丙朝)가 지어준 것으로 중국 동진시대(4세기)의 유명한 화가 고개지(顧愷之)처럼 되라는 의미에서 고개지의 ‘고(顧)’를 따 와 지었다.
5월, 18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황량(荒凉)〉으로 총독상을 수상하였고 또 다른 두 점 〈여름 날〉과 〈소추(蕭秋)〉가 입선하였다. 다음 해인 1940년에는 〈가을〉을 출품하였고 이후로도 이응노는 《조선미술전람회》가 막을 내리는 1944년까지 해마다 출품하였다.
7월, 《조선서도진흥회전람회》에 〈양추(凉秋)〉을 출품하여 수상하였다.
여름, 부여와 대전 일대를 스케치 여행하였다. 이 무렵부터 해방 직후까지 이응노는 수시로 한국으로 돌아와 홍성과 예산, 공주를 비롯한 충남 지역을 여행하며 많은 스케치를 남겼다.
12월, 화신백화점 화랑(지금의 서울 종로타워 부지에 있던 백화점)에서 《고암 이응노 화백 신남화전》을 열었다.

1941년

38세

봄에 외금강과 해금강 등 금강산 일대를 스케치 여행하였다. 1945년 초봄에도 금강산을 여행하였고 여행 때 스케치들을 바탕으로 〈외금강 집선봉〉(1941), 〈총석정〉(1941), 〈외금강 육화암〉(1945), 〈정양사 망금강〉(1950년대 중반) 등 뛰어난 금강산도를 여러 점 그렸다.
6월, 화신백화점 화랑에서 《고암 이응노 화백 제2회 남화신작전》을 열었다.
제6회 《일본화원전》에 〈황량〉을 출품하였고 영구 무감사 회우로 추거되었다.

1945년

42세

3월, 도쿄 공습이 시작되고 일본의 패전이 확실해지자 일본에 있던 친척들을
데리고 귀국하였다. 징용을 피해 시흥, 천안 등에 피신해 있다가 예산 덕숭산
수덕사 아래 있는 수덕여관을 사들였다. 생계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커다란 방들이
화실로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었다.
8월 15일, 고향 홍성에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곧바로 서울로 상경하여 남산 밑에
화실을 갖춘 집을 마련하였다. 작업실, 사랑방, 교육공간을 겸한 그의 화실은
처음에는 ‘고암화실’로 불리었고 1949년 9월 ‘고암화숙(顧菴畵塾)’으로
확장되었다.
9월, 단구미술원(檀丘美術院) 결성에 참여하였다. 단구미술원은 동양화단의 계파를 초월하여 단결하고 새로운 민족회화의 진로를 개척한다는 목표 아래 결성된, 해방 이후 최초의 동양화 단체였다.
10월, 덕수궁에서 열린 《해방기념종합미술전》에 출품하였다.

1946년

43세

3월 1일, 3·1절을 기념하여 열린 제1회 단구미술원전에 〈투쟁〉 등을 출품하여 호평을 받았다. 〈투쟁〉은 3·1운동 시위행렬을 그린 작품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4월, 자유신문사 주최 《두방전》에 출품하고 수익금을 전쟁으로 고통을 겪은 사람들에게 기부하였다.
5월, 소전 손재형(素筌 孫在馨), 철농 이기우(鐵農 李基雨) 등의 서예가들과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 청강 김영기(晴江 金永基), 재당 배렴(齋堂 裵濂) 등 동양화가들까지 모두 25명이 결성한 조선서화동연회에 참여하였다.
7월, 미국 적십자 은행 클럽 초대로 클럽 라운지에서 개인전을 열고 43점을 전시하였다.

1947년

44세

친구 김영기(스승 김규진의 아들)의 경기도 양주 저택에서 가족들과 함께 거주하며 작품을 제작하였다.
6월, 동화백화점(지금의 서울 신세계백화점) 화랑에서 근작 40여 점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11월, 미군정청 문교부가 주회하여 경복궁 근정전에서 열린 《조선종합미술전람회》에 출품하였다.
이 무렵 이화여자대학교 미술과에서 동양화를 전공하던 박인경(朴仁景)을 만났다. 박인경은 1940년대 말부터 이응노의 새로운 반려자로서 이응노의 삶과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48년

45세

3월, 홍익대학 미술학부의 주임교수가 되어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날 무렵까지 동양화부를 지도하였다.

1949년

46세

2월,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이석호 이응노 2인전》을 열었다. 일관 이석호(一觀 李碩鎬)는 이응노와 함께 단구미술원에 참여하였으며 남산 이응노의 집을 자주 드나들던 친구였다. 이응노가 손녀 이경인의 돌잔치를 열고 동료화가들을 초청하여 잔치 광경을 그림으로 남기려하자 이석호는 난초를 그려주며 축하하기도 했다.
11월,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가 신설되었고 이응노는 문화부 장관 명의로 초대받았으나 거절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초대되었으나 소수의 화가들이 독점하는 국전 운영방식을 비판하며 1958년 한국을 떠날 때까지 줄곧 출품하지 않았다.
12월, 화신백화점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고 〈돌진〉 등 20여 점을 전시하였다.

1950년

47세

6월,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이응노는 한강철교가 폭파되어 피난 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았다. 이 때 아들 이문세(李文世)가 북한으로 끌려갔고 이 사건은 후에
이응노가 동백림 사건에 휘말리는 원인이 되었다.
12월, 홍성 홍천마을의 생가 근처로 피난을 갔다. 피난 생활 중에도 수덕사 일대는
물론이고 목포, 부산 등을 돌아다니며 스케치를 멈추지 않았고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1952년

49세

3월, 부산에서 대한미술협회가 주최한 열린 《3.1기념미술전》에 〈피난민〉을 출품하였다.

1953년

50세

7월, 휴전이 되자 서울로 올라왔다. 마포구 도화동의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산비탈에 집을 짓고 ‘도화산방(桃花山房)’이라 이름 붙였다.
예산, 홍성, 수원, 서울(소공동 성림다방) 등에서 연달아 개인전을 열었다. 출품작들은 〈취야(醉夜)〉, 〈피난길〉, 〈투계〉, 〈해 뜰 무렵〉, 〈신록〉 등이었다.

1954년

51세

서라벌예술대학에 출강하였다. 이 무렵 부인 박인경과 함께 이중섭(李仲燮), 박고석(朴古石) 등과 어울렸다.
6월, 《6·25 4주년 기념 대한미협전》에 〈영차영차〉, 〈노우(怒牛)〉, 〈반격〉 등을 출품하였다.

1955년

52세

『동양화의 감상과 기법』의 원고를 저술하였다. 중고등학교 미술수업교재용으로 만들어진 이 책은 동양화 교육에 대한 이응노의 남다른 열정을 보여준다.
1월, 대전 문화원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2월, 경주를 여행하였고 이때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6월에 열린 《대한미술협회전》에 〈금강역사〉 등을 출품하였다.
6월, 서울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경주를 비롯해 서울과 수덕사 부근을 그린 풍경화와 풍속화, 동물 그림 등 52점이 전시되었다.

1956년

53세

1월, 종로구 신교동 산1번지에 화실을 새로 마련하고 성인반, 중고학생반, 국민아동반 등을 두어 수강생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4월, 『동양화의 감상과 기법』이 1956년 문화교육출판사에서 간행되었다.

1957년

54세

8월, 한미재단, 아시아재단 등이 후원하고 뉴욕 월드하우스 갤러리(New York World House Gallery)에서 기획한 《한국현대미술전》의 출품작으로 〈출범(出帆)〉과 〈산〉이 선정되었다. 이 작품들은 다음 해인 1958년 2월 뉴욕에서 전시되었고 전시 후에는 록펠러 재단에서 구입하여 뉴욕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에 기증하였다. 이 경험은 이응노가 적극적으로 유럽과 미국미술계 진출을 꿈꾸는 계기가 되었다.
11월, 조선일보사에서 주최하는 제1회 《현대작가초대미술전》에 초대받아 〈숲〉, 〈산〉, 〈은조(隱鳥)〉를 출품하였다. 《현대작가초대미술전》은 당시 막 시작되던 한국 추상미술을 후원하고자 만들어진 성격의 전시회였다.
프랑스 미술평론가 자크 라세뉴(Jacques Lassaigne)로부터 파리 초청장을 받았다. 이응노가 프랑스의 한국인 유학생에게 보낸 그림을 본 자크 라세뉴가 이응노의 개인전을 파리에서 열고자 초청장을 보낸 것이다.

1958년

55세

3월, 프랑스로 떠나기 전 이를 기념하여 《도불전(渡佛展)》을 열었다. 〈비원(秘苑)〉, 〈생맥(生脈)〉, 〈우후(雨後)〉, 〈해저(海底)〉 등 60여 점이 전시되었다.
6월, 제2회 《현대작가초대미술전》에 초대받아 〈비장(秘藏)〉, 〈비원〉 등을 출품하였다.
12월 26일, 부인 박인경, 아들 이융세(李隆世)와 함께 프랑스로 떠났다. 파리에서 1주일가량 머물며 자크 라세뉴를 만난 뒤 다시 독일로 떠났다. 독일 방문은 이응노를 후원하던 주한 독일대사 리하르트 헤르츠(Richard Hertz)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

1959년

56세

1월부터 다음 해인 1960년 1월까지 독일에서 1년 머무는
동안 프랑크푸르트, 쾰른, 본을 순회하며 네 차례의 개인전을
열었다. 프랑크푸르트와 본의 전시회는 박인경과 함께 한 부부전이었다.
본의 한국대사관에서는 매주 목요일마다 강습회를 열어 독일 주재 외교관 부인들에게 수묵화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카셀(Kasse)의 《도큐멘타(Documenta) II》(1959.7.11.-10.11)를 관람했다.

1960년

57세

1월, 파리로 이주하였다. 10월, 파리의 파케티 갤러리(Galerie Paul Facchetti)에서 열린 그룹전에 초대받아 4점을 출품하였다. 이 중 3점이 판매되었고 이 전시를 계기로 11월, 파케티 갤러리와 4년(1961-1964)의 전속계약을 맺었다. 파케티 갤러리는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을 프랑스에 처음 소개한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2차 세계대전 이후 ‘앵포르멜(Informel)’과 ‘서정 추상(Abstraction Lyrique)’이라는 유럽 전위미술운동을 주도하는 갤러리였다. 이곳과 전속계약을 맺으면서 이응노는 유럽 미술계에 성공적으로 인착할 수 있었다.
이 무렵 파리 남서쪽에 위치한 베르사유 세브르 지역에 아뜰리에를 마련하였다. 이곳에서 이응노는 콜라주, 도자기, 판화, 조각 등 다양한 재료와 기법의 추상작품을 왕성하게 실험하였다.

1961년

58세

2월, 파리시립현대미술관(Musée d’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에서 열린 《살롱 콩파레종((Le Salon Comparaisons)》에 〈컴포지션〉을 출품하였다.
10월, 미국 카네기 인스티튜트에서 열린 《피츠버그 국제미술제(The Pittsburgh International Exhibition of Contemporary Painting and Sculpture)》에 콜라주 작품을 출품하였다.

1962년

59세

5월, 파리 정착 후 첫 개인전으로 파케티 갤러리에서 《이응노 : 콜라주(Ungno Lee Collages)》를 열었다. 전시회 제목이 알려주는 대로 17점의 전시작품 가운데 15점이 콜라주였다(나머지 2점은 수묵으로 그린 추상화였다).
6월, 프랑스로 이주한 후 첫 한국에서의 개인전을 서울 중앙공보관에서 열었다. 이 전시회에 출품된 27점의 작품들 역시 콜라주 추상이었다.

1963년

60세

1월, 스위스 라 쇼드퐁 시립미술관(Musée des Beaux-Arts La Chaux-de-Fonds)에서 스페인의 마누엘 리베라(Manuel Rivera), 덴마크의 리처드 모르텐센(Richard Mortensen)과 함께 3인전을 열었다. 각자에게 할애된 전시장에서 개인전처럼 진행되었고 이응노는 23점의 콜라주를 전시하였다.
3월, 파리의 막스 카가노비치 갤러리(Galerie Max Kaganovitch)에서 열린 전시회에 출품하였다. 3명의 미술평론가가 각각 한 명의 조각가와 세 명의 화가를 추천하는 형식으로 꾸며진 이 전시회에서 이응노는 자크 라세뉴의 추천작가로서 참여하였다.
6월, 스위스 로잔느 캉토날미술관에서 열린 《제1회 국제선구적 화랑전(1er Salon international le Galeries Pilotes Lausanne)에 출품하였다.
11월, 독일 뮌헨 프리드리히 운트 딜렘 갤러리(Galerie Friedrich+Dahlem)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1964년

61세

파리의 파케티 갤러리, 스위스의 누마가 갤러리(la Galerie Numaga), 오스트리아의 갤러리16(Galerie 16) 등 유럽 전역에서 초청받아 전시회를 열며 활동반경을 넓혀나갔다.
11월 초, 프랑스 파리에 동양미술학교(L’Académie de Peinture Orientale de Paris)를 설립하였다. 수묵화와 서예를 가르치는 이 학교는 파리 동양미술박물관인 세르누쉬 미술관(Musée Cerunuschi)의 관장을 비롯해 한스 아르퉁(Hans Hartung), 피에르 술라주(Pierre Soulages), 자오우키(趙無極, Zao Wou Ki), 장다이치엔(張大千), 후지타 츠구하루(藤田嗣治), 스가이 쿠미(菅井汲), 메이 투(Mei Thu) 등 작가들과 미술평론가, 역사학자, 철학자 등 모두 14명의 후원 아래 세르누쉬 미술관 관내에 설립되었다. 파리동양미술학교의 설립은 해방 이후 설립한 고암화숙의 연장선에 있으며 동시에 유럽에 동양미술의 아름다움을 전달하려던 노력의 결과였다. 파리동양미술학교는 이응노의 서거 이후에도 부인 박인경과 아들 이융세가 운영하며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였다.

1965년

62세

9월, 브라질에서 열린 《제8회 상파울루 비엔날레(Biennale de Saõ Paulo)》에서 은상을 수상하였다.

1966년

63세

3월, 파리시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살롱 콩파레종》에 〈컴포지션〉을 출품하였다. 기존의 평면회화에 나무로 만든 탈을 부착하여 부조(浮彫)의 느낌을 주는 작품이었다.
11월, 덴마크 코펜하겐 국립미술관(National museet København)의 히블레르 갤러리(Galerie Hybler)에서 개인전을 열고 수묵추상을 비롯한 추상작품을 전시하였다. 이 해 10월 덴마크 국립박물관에 창덕궁 비원을 본떠 만들어진 한국관이 만들어졌고 이응노의 개인전은 한국관의 개관에 맞추어 열렸다.

1967년

64세

프랑스 세브르 국립도자공장(Manufacture Nationale de Sèvres)에서 이응노의 아뜰리에를 방문하고 그의 작품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현대 도자기 개발을 제안하였다.
3월, 스위스의 누마가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나무와 철을 재료로 사용한 부조와 입체조각 30여 점을 전시하였다.
6월 21일,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되어 한국으로 송환된 후 재판을 받고 수감되었다. 한국전쟁 중에 납북된 아들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에 동베를린을 방문했으나 만나지 못했던 사실이 빌미가 되었다. 이응노는 서대문구치소와 대전교도소, 안양교도소를 거치며 1년 8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하였다. 이 시기에 유럽의 많은 미술평론가, 미술관장, 동료작가 등이 이응노의 석방을 바라는 탄원서를 한국 정부에 제출하며 구명운동을 벌였다.

1969년

66세

3월, 형집행정지로 출소하였다. 수감 기간 동안 도시락통, 부채,
밥풀, 간장 등 손에 잡히는 모든 재료를 사용해 회화, 조각, 판화 등
‘옥중작’ 300여 점을 만들었다. 이 중 일부는 바로 스위스 누마가 갤러리에서
전시되었고(3.16-4.13), 일부는 5월에 미국인 칼 밀러(Carl F. Miller)’의 가회동 집에서 열린 ‘옥중작품전’에서 전시되었다. 또 충남 홍성의 수덕여관에서 몸을 추스르는 동안 여관 마당에 있는 바위에 문자추상 암각화를 제작하였다. 이 작품은 지금도 수덕여관(현재 이응노선생사적지)에 남아 있다.
5월 23일, 프랑스로 돌아갔다.
9월, 파리 이란의 집(La Maison de l’Iran)에서 열린 《아시아 예술가전(Les Peintures Asiatiques de Paris)》에 출품하였다.
12월, 파케티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동백림 사건 이후 한자와 한글 등 문자의 해체와 재구성을 통한 문자추상을 본격적으로 시도하였다. 고국에서의 불행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이응노는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해나갔고 유럽과 미국에서 작가적 위상을 높여나갔다.

1970년

67세

3월, ’70 오사카 엑스포(Osaka Expo)에서 열린 국제미술전 《현대적 경향 – 오늘의 역동성(Contemporary Trends: le Dynamisme du Present)》에 출품하였다. 이응노가 출품한 작품은 두꺼운 솜을 사용한 문자추상 작품이었고 전시관 내의 ‘전위예술실’에 걸렸다.
8월, 남프랑스 바칼레스 해변가에 새로 지어진 사브르미술관(le Musée des Sables) 개관전에 참여하였다. 세계 각국의 조각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작업한 조각과 토템이 바닷가 ‘모래사장 미술관’에 전시되었다. 이응노 역시 높이 10m에 지름 1m 50cm인 거대한 아프리카 산 원목에 문자추상을 연상시키는 토템기둥을 조각하였다. 이 전시회에는 한국의 조각가 문신도 참여하여 이응노와 함께 작업하였다.
11월,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파케티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이 무렵 아뜰리에를 파리 시내로 옮겼다. ‘빠스퇴르’와 ‘악소’지역의 아뜰리에에서 이응노는 1970년대 대표적인 문자추상을 제작하였다.

1971년

68세

11월, 《제1회 파리동양미술학교 학생전》을 열었다. 30여 명의 출품자들은 전문적인 작가부터 초보적인 학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는데 모두 동양의 수묵담채화에 매료되어 기초적인 수묵화기법부터 배운 이들이었다. 출품작 역시 묵죽화, 화조화, 풍경화 등 여러 장르에 걸쳐 있었고 이응노와 박인경, 이응노의 조카 이희세의 작품도 함께 전시되었다.

1972년

69세

2월, 프랑스 모빌리에 국립미술관(Manufactures du Mobilier national)에서 태피스트리의 모델이 될 작품을 의뢰하였다. 모빌리에 국립미술관은 피카소 등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을 태피스트리로 제작, 소장하고 있는 미술관이다. 이응노의 ‘콜라주’를 원작으로 하는 태피스트리는 다음 해인 1973년에 완성되었다. 이 작업을 계기로 모빌리에 미술관은 1973년부터 2009년까지 이응노의 작품을 모델로 ‘땅’, ‘밤나무’, ‘춤’, ‘군중’ 등을 다룬 9점의 태피스트리를 제작하였다.
8월, 이탈리아 베니스의 스탐팔리아 재단 미술관(Querini Stampalia)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개인전은 베니스 비엔날레와 베니스 국제영화제 기간과 맞물려 많은 관심을 모았다.

1973년

70세

1월, 프랑스의 동양예술평론가 피에르 자키야르와 공저로 『서예, 중국회화 그리고 추상회화
(Calligraphie, peinture chinoise et art abstrait)』를 펴냈다.
6월,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제6회 국제 태피스트리 비엔날레(International Biennial of Tapestry)》에 출품하였다. 출품작은 〈태양〉이란 제목의 2.14×3.20m에 달하는 거대한 태피스트리였다.
7월, 유럽의 유명 조각가 28명이 참여하는 《공간을 위한 포름(Formes pour un Espace)》에 초대받아 조각을 출품하였다. 한국 조각가 문신도 함께 출품하였다.

1974년

71세

11월, 파리의 아닉 르므완 갤러리(Atelier Exposition Annick Le Moine)에서 《서예전(Calligraphie Chinoises)》을 열었다. 전시 기간 동안 매주 목요일마다 이응노는 한복을 입고 노끈으로 만든 거대한 붓으로 종이 위를 걸어 다니며 글씨를 쓰는 퍼포먼스를 열었다. 또 다른 요일에는 흑백의상을 입은 여러 남녀 무용수들이 몸동작으로 글씨의 획과 점을 만들어내는 공연을 했다. 이 공연장면은 비디오로 제작되었으며 공연사진 역시 1977년 앙드레 모랭(André Morain)의 사진집 『예술계의 중심(Le Milieu de l’Art)』에 수록되었다. 이 《서예전》은 다음 해로 이어졌고 2월에는 남프랑스 보르도 시의 플뢰브 갤러리에서 순회전으로 열렸다.
〈주역64괘차서도(周易64卦次序圖)〉를 제작하였다.

1975년

72세

4월, 파리 퐁피두 센터(Centre National d’art et de Culture George Pompidou)에서 열린 전시회에 한자로 ‘中心’이라고 쓴 서예작품을 출품하였다.
5월, 서울 현대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모두 100여 점이 출품된 대규모 전시회였고 동물그림에서부터 금강산 그림, 산수풍경, 사군자, 수묵추상, 문자추상, 판화 등 다양한 장르가 망라되었다.
6월, 영국 브리스톨 시립미술관에서 《이응노 회화와 콜라주》라는 회고전이 열렸다. 1954년 이후 현재까지의 작품 50여 점이 전시되었다.
7월, 프랑스 망통에서 열린 《제1회 태피스트리 비엔날레(Biennale Francaise de la Tapisserie)》에 〈밤나무〉와 〈콤포지션〉 두 점을 출품하였다.

1976년

73세

5월, 신세계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하나’에서부터 ‘쉰’까지 한글 숫자로 제목을 붙인 50점이 전시되었다.
11월, 파리 페로네 거리에 고려화랑을 개관하였다. 고려화랑에서 이응노는 동양화를 가르치는 개인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자신의 개인전을 비롯한 파리동양미술학교 학생전과 이응노·마크 토비·로비에스 3인전(1977), 일본인 화가 도미야마 다에코 개인전(1982) 등을 열었다.
프랑스 주앵빌 고등학교에 벽화를 제작하였다.

1977년

74세

3월, 서울 문헌화랑에서 《고암 이응노 무화(舞畵) 발표전》을 열었다. 〈새춤〉, 〈삼인무(三人舞)〉, 〈죽엽무(竹葉舞)〉, 〈학춤〉, 〈군무〉 등 ‘춤’을 주제로 한 작품 50점이 전시되었다.
5월, 파리 국립장식미술관(Musée des ArtsDécoratifs)에서 열린 《예술가/장인?(Artiste/Artisan?)》 전시회에 출품하였다.
6월, 고려화랑에서 이응노 판화전을 열었다.
일본 평론가 하리우 이치로(針生一郞)의 초대로 도쿄에서 열린 제1회 JAALA전에 출품하였다. JAALA전은 일본과 제3세계(Asia-Africa-Latin America) 작가들과의 국제 교류를 추진하는 일본미술가단체로서 이응노는 창립전에 초대받았다.
이 해에 다시 북한의 피아니스트 백건우 납치미수 사건의 연루자로 의심받으며 한국 내에서 작품발표는 물론이고 일체의 작품 매매가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 이후 국내 정치상황가 변화하여 1989년 1월 한국에서의 개인전이 기획될 때까지 12년 동안 한국과 관계가 단절되었다.

1978년

75세

8월, 동양화 교재인 『수묵담채화법(L’art de Peindre a L’encre de Chine)』을 출판하였다. 동양화의 재료인 종이와 붓, 먹의 기법에서부터 인장(印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동양화 제작기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12월, 스위스 라 쇼드퐁 시립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서예 32점, 병풍 2점, 태피스트리 2점을 포함해 모두 51점이 전시되었고 이 중 서예 〈수산복해(水山福海)〉가 전시가 끝난 후 시립미술관에 기증되었다.

1979년

76세

프랑스 조폐국에서 이응노의 작품을 모델로 메달을 제작하였다. 프랑스 조폐국에서는 메달 제작을 위해 유명 화가들에게 디자인을 의뢰하는데, 이응노 역시 1980년대까지 군상을 이용한 메달을 여러 차례 디자인해주었다.

1980년

79세

〈동방견문록〉 연작을 제작하였다. 이 연작들은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
에 관한 책을 집필하던 한 작가가 이응노에게 삽화를 부탁하여 제작되었다.

1981년

78세

5월, 일본 도쿄의 산요(さんよう)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한국민주화지원
긴급세계대회 문화위원회가 주최하여 열린 전시회였다. 이응노는 일본 방문을
원했지만 비자문제로 이뤄지지 못했다. 이 전시를 계기로 같은 해 6월 나고야의 산요갤러리, 12월 도쿄의 히노키화랑(檜畵廊에서 잇달아 이응노 개인전이 열렸다.
이 무렵 이응노는 아뜰리에를 파리 근교의 프레 생 제르베로 옮겼다. 프레 생 제르베의 작업장은 원래 구두공장이었기 때문에 커다란 규모의 작품을 제작하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이응노는 이 아뜰리에의 담벽에 직접 제작한 접시와 조각들을 붙여 문자추상벽화를 만들었는데 독특한 아름다움으로 현재도 지역의 명소로 불린다.

1982년

79세

3월, 파리 고려화랑에서 일본 작가 도미야마 다에코(富山妙子) 개인전을 열었다. 도미야마 다에코는 일본의 식민지배를 반성하는 글과 작품을 발표하고 김지하의 시를 테마로 그림과 시, 음악으로 구성된 전시회를 연 작가였다. 도미야마는 이응노의 자택에서 두 달 동안 머무는 동안 이응노·박인경 부부와 나눈 대화를 일본으로 돌아간 후 『기록』지에 1년 동안 연재하였다. 또 그 내용을 다시 편집하여 1985년 『서울·파리·도쿄』라는 단행본으로 출판하였다. 이 책은 1994년 한국에서도 출판되었다.

1983년

80세

10월, 부인 박인경, 아들 이융세와 함께 프랑스로 귀화하였다. 한국정부에서 여권을 발급받을 수 없게 되고 해외에서 열리는 자신의 전시회에 참가하는 것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1984년

81세

6월, 파리 고려화랑에서 《먹과 흙, 서예적 행위》를 열었다.
11월, 스위스 라 쇼드퐁 시의 클럽 44에서 개인전 《군상–기호 1974-1984》를 열고 〈군상〉 시리즈를 전시하였다.

1985년

82세

10월, 일본 가나가와 현민 갤러리(神奈川縣立民ギャラリ)에서 《이응노·박인경 부부전 : 민중 시리즈, 옥중 시리즈, 길 시리즈》를 열었다.
11월, 일본 도쿄 산요 갤러리에서 《이응노·박인경 부부전 : 판화와 소품》을 열었다. 일본에서 연달아 열린 부부전은 일본의 ‘이응노부부를 초대하는 모임’이 주관하여 이루어졌으며 이응노는 이 전시회에 참석하기 위해 부인 박인경과 함께 일본을 방문하였다.

1986년

83세

일본 기록사에서 이응노·박인경 부부의 삶과 작품세계를 다룬 기록영화 〈우리나라〉(감독 후쿠다 다카시(福田孝), 16mm칼라, 40분)를 제작하였다.
가을, 평양 조선미술박물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1987년

84세

12월, 한국의 민족예술인총연합 창립총회에서 지도위원으로 추대되었고 창립총회에 축사를 보냈다.

1988년

85세

6월, 뉴욕 브루노 파케티 갤러리(Bruno Facchetti Gallery)에서 《이응노 회고, 1950-1980》이 열렸다.

1989년

86세

1월,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12년만에 개인전을 열었다.
1월 10일, 호암갤러리에서 개인전이 열리고 있을 때 파리에서 별세하였다. 이응노는 외젠 들라크루아, 프레데릭 쇼팽, 오노레 발자크, 오스카 와일드 등 유명 예술인들이 잠들어 있는 파리 시립 페르 라세즈 묘지(Pére Lachaise)에 안장되었다.
이응노를 추모하는 전시회가 프랑스 세르누쉬미술관, 일본 아사히갤러리, 오사카ABC갤러리 등지에서 열렸다.

2000
-2005년

4월, 서울 평창동에 이응노미술관이 설립되었다.
11월, 서울 평창동 이응노미술관에서 《42년만에 다시 보는 이응노 도불전》이 개관전으로 열렸다. 1958년 3월 이응노가 한국을 떠나기 전 열었던 《도불전》의 출품작들을 다시 전시하는 자리였다. 평창동의 이응노미술관은 2005년까지 이응노 작품세계를 조명하는 전시회를 꾸준히 열었다.

2007년

5월, 대전광역시 이응노미술관이 개관하였다. 개관전으로 《고암, 예술의 숲을 거닐다 파리에서 대전으로》가 개최되었다.

2012년~

1월, 재단법인 대전고암미술문화재단이 설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